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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사월초파일의 연등燃燈을 준비하기 위해 아이들이 행한 놀이.

내용

호기놀이는 고려시대에 연등회와 짝을 이루어 주로 행해졌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공민왕이 사월초파일에 연등을 하고 궁전 뜰에서 아이들의 호기희를 구경한 뒤 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초파일이면 집집마다 등을 다는 풍습이 있어, 수십 일 전부터 아이들이 장대에 종이를 오려 붙인 깃발을 만들어 성안 거리를 돌아다니며 소리쳐 쌀과 베를 구해 그 비용으로 삼았는데 이를 ‘호기’라 부른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세시를 다룬 여러 문헌에 초파일의 풍습으로 호기에 대한 ### 내용이 나온다. 조선 전기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호기 풍속이 전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물고기 껍질로 북을 만들어 길거리를 몰려다니며 등불 켤 기구를 얻으러 다닌다.”라고 하였다. 깃발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북을 쳐 호기를 알리고 왕을 비롯한 대중이 이를 구경한 점으로 보아, 노래와 춤 등의 연희도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후대로 올수록 깃발을 들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옛 기록을 전하는 데 그치고, 연등을 위한 등간燈竿과 관련해 호기를 설명하고 있다. 민가에서부터 상가와 관아에 이르기까지 등을 달기 위해 대나무를 이어 등간을 높이 세우고, 그 끝에 천으로 깃발을 달았다는 것이다.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도 “등간에 깃발을 다는 것은 호기의 풍습”이라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아이들의 호기놀이 전승 양상은 확실하지 않지만, 호기놀이의 깃발을 단 장대가 연등을 달기 위한 등간과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호기놀이에서 중요한 점은 ‘아이’와 ‘장대’의 종교적 상징성이다.

첫째, 연등회에서 아이들이 호기를 한 것은 공동체 제의를 앞둔 정화 의식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동서고금 없이 의례에 등장하는 아이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으로 의례 공간을 정화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최남선은 호기를 이두로 읽으면 불긔(purki)라 발음되므로, 그의 ‘imagefont사상’과 관련해 불의 행사를 치르기 전에 제장祭場을 정화하는 의식으로 보았다. 편무영은 팔관회에도 화랑이 등장하는 점을 들면서, 두 의례의 사전 준비에 해당하는 정화 의식에 아동이 등장하는 공통점을 지적하였다.

둘째, 아이들이 들고 다닌 장대와 등을 달기 위한 장대는 신적 존재와 소통하는 신간神竿의 상징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고래로부터 나무를 비롯해 탑, 솟대, 장승, 서낭대 등과 같은 수직의 구조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입간立竿 민속이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물은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알리고 신의 뜻이 내려오는 매개로 여긴다는 점에서 일종의 신간이자 우주목宇宙木에 해당한다. 무당의 집에 세우는 대나무 장대는 신간의 전형적 모습이다. 아이들의 호기놀이가 마을 제의를 시작하기 전에 무당이 장대를 흔들며 집집마다 도는 것과 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농사가 시작되는 2월이면 집집마다 농경신인 영등신을 모시기 위해 장대를 세우고 헝겊이나 종이를 다는 풍습이 있다. 연등회는 정월대보름에 행하다가 1010년(고려 현종 1)에 2월 보름으로 변경했는데, 민간의 영등 신앙은 이러한 2월 보름 연등회와 관련이 깊다. 따라서 호기는 단순한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라 걸립乞粒의 형태를 띤 제전祭前 정화의 식이라 할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호기놀이는 민간신앙의 보편성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놀이적 의식이다. 호기라는 말이 ‘깃발로 부른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듯이, 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호기놀이뿐만 아니라 장대를 세우고 무언가를 다는 입간문화 또한 호기에 해당한다. 장대 자체가 신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대에 기를 닮으로써 인간의 메시지를 신에게 전하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승 ###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호기는 초파일에 국한되지 않고 연등회와 각종 제의에서 광범위하게 이어진 민간신앙의 주요 요소라 할 수 있다.

제주 지게 발 걷기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제주도특별자치도의 옛 ### 정의 지역 아이들이 지게를 만드는 가지 돋친 나뭇가지 둘을 양손으로 잡고 발을 가지에 얹어 목발처럼 이용하면서 재주를 겨루던 놀이.

내용

놀이 도구는 지게 만드는 것과 같은 나뭇가지이다. 이를 지게 발이라고 하기에 놀이를 ‘지게 발 걷기’라고 한다. 옛 ### 정의 지역에서 아이들이 즐겨 하던 놀이이다. 본래 어른들이 생활의 필요에서 고안한 걷기 방식을 놀이화한 것이다. ### 정의 지역 사람들은 비가 온 뒤에 신발을 더럽히지 않게 하려고 혹은 눈이 쌓였을 때 발이 빠지지 않게 하려고 지게 발을 이용하여 걷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를 아이들이 놀이로 삼은 것이다. 지게 발을 목발처럼 이용하는 것이 전부인데, 이처럼 도구가 간단하여 누구나 쉽게 마련할 수 있다.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 가운데 가지가 두 갈래로 나뉜 부분이 있으면서 잘 마른 것을 골라 가지 돋은 부위의 위치를 맞추어 같은 길이로 잘라내면 그만이다. 다만 자신의 몸에 맞게 발판이 되는 가지 부분의 높이와 전체의 길이를 가늠하여 만들려는 노력이 따르기는 한다. 놀이 방법은 여럿으로 멀리가기, 오래 걷기, 빨리 걷기, 넘어뜨리기 등이다. 멀리가기는 지게 발을 짚고 멀리 가기를 겨루는 것이다. 오래 걷기는 한정된 공간을 오가며 오래 넘어지지 않고 유지하기를 겨루는 것이다. 빨리 걷기는 빠르기를 두고 겨루는 것이다. 넘어뜨리기는 상대편을 밀쳐 쓰러뜨리기를 겨루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기본은 발을 땅에 내려놓거나 쓰러지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것이다. 여럿이 편을 나누어 겨루기도 하고, 둘이나 셋이 겨루기도 하였다. 동네 아이들이 두루 모여 함께 노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에 따라 대개 편을 갈라 경쟁하곤 하였다. 놀이 방법이 매우 단순하고, 규칙이 간단하다.

특징 및 의의

생활의 필요에서 생긴 걷기 방식을 아이들의 놀이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쓰러져도 눈밭에서 넘어지는 것이어서 웬만해서는 다칠 위험이 없다. 노는 아이나 보는 사람이나 그저 즐겁기만 한 놀이이다. 실제로 제주민속촌과 같은 곳에서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체험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보기만큼 그다지 쉽지 않지만,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겨 볼 수 있는 놀이여서 흥미롭다고 말한다. 이렇게 과거에 행해졌던 놀이는 얼마든지 아이들의 놀이로 되살릴 수 있다.

함안 낙화놀이 정의, 역사,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경상남도 함안 함안면 괴항마을에서 매년 사월초파일에 숯가루를 이용해 만든 낙화를 매달고 불을 붙여 놀던 불꽃놀이.

역사

함안 낙화놀이의 유래는 정확히 전하여지지는 않지만 문헌과 조사를 통해 본 결과 17세기 조선 중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함안 낙화놀이는 이수정낙화놀이 또는 무진정 낙화놀이라고도 불리는데, 조선 선조 때 이 지역 군수였던 정구가 최초로 창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함안 낙화놀이의 최초의 기록은 오횡묵의 『함안총쇄록』에 등장한다. 오횡묵은 함안 군수로 부임해 있던 4년 기간 중 1890년과 1892년 사월초파일에 행한 낙화놀이를 보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낙화놀이는 함안읍성 전체에서 행해져 산 위에서 구경할 정도로 대규모였다고 한다.

괴항마을 주민들은 19세기 말까지도 낙화놀이를 자체적으로 전승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벌 논매기를 끝마친 후 사월초파일 관등놀이를 할 때에 불씨 주머니를 등에 달아서 놀이를 하였다. 이때는 부정기적으로 2∼5년마다 한 번씩 놀았다. 당시에는 낙화놀이의 주재료인 숯을 마을에서 직접 구운 것이 아니라 마을 안쪽 골짜기의 기와가마에서 기와를 굽고 난 후 남은 숯을 줍거나 얻어 와서 마을 주민들이 빻아 낙화를 만들었다. 낙화놀이의 장소는 괴항마을 북동쪽 함안천과 인접한 이수정(무진정)이다. 낙화놀이의 주체는 마을 주민으로 자발적으로 소요 경비와 낙화놀이 재료를 준비하였다. 낙화놀이는 특별한 진행 절차가 없이 행사 당일 오후 마을 풍물패에 의한 풍물놀이가 벌어졌으며, 어둠이 내리면 낙화에 불을 붙여 낙화놀이를 하였다.

한편으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 경상남도편에 따르면, 낙화놀이를 조선시대 서생書生들이 시회詩會를 열 때에 곁들인 놀이로 소개하고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기 말살 정책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광복 후 괴항마을에서 사월초파일에 낙화놀이를 다시 재현하였고, 1960년대에는 마을 자체적으로 참나무로 숯을 직접 구워 낙화놀이를 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낙화놀이는 특별한 진형 절차나 고유제 없이 마을별 풍물놀이로 전후 공연을 하였다. 이후 1985년 다시 낙화놀이가 복원·재구성되었고, 2001년 이수정낙화놀이보존회를 구성하게 되어 조직적으로 전승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수정낙화놀이라는 명칭으로 군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년 사월초파일을 전후하여 이수정 일대에서 열렸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함안면민을 중심으로 함안 낙화놀이보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008년 10월 30일 ‘함안 낙화놀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내용

낙화놀이는 ‘낙화유落火遊’, ‘줄불놀이’라고도 한다. 밤하늘에 흩어지는 불꽃을 관상하던 운치 있는 놀이로, 주로 뱃놀이나 시회·관등놀이 등에서 놀이의 흥을 돋우기 위해 행하였다. 뽕나무나 소나무 또는 상수리나무 껍질을 태워 만든 숯가루를 한지 주머니에 채우고 그것을 나뭇가지나 긴 장대 또는 추녀 끝이나 강가 절벽 위에 줄을 매고 매달아 불을 붙인다. 그러면 불씨 주머니에 든 숯가루가 타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이러한 모습이 마치 ‘불꽃’이 떨어져 날아가는 것 같아 ‘낙화놀이’라고 불렸다. 함안 낙화놀이는 연등 사이에 참나무 숯가루로 만든 낙화를 매달아 이 낙화에 불을 붙여 꽃가루처럼 물 위에 날리는 불꽃놀이다. 낙화놀이에 사용하는 숯가루는 민간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며, 여기에 심지를 박아 불을 붙여 태우면 낙화落火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데 떨어지는 불씨의 형상이 마치 꽃가루가 날리는 것처럼 비유되어 낙화落花로 풀이된 것이라 한다.

함안 낙화놀이는 마을 자체에서 제작한 숯가루를 한지에 돌돌 말아 낙화 심지를 만들고 이것을 이수정 연못 위에 걸쳐진 줄에 매다는 것으로 준비가 완료된다. 이어서 줄에 매달린 낙화 심지에 불을 붙임으로써 숯가루가 불을 머금고 타면서 바람에 날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구체적으로 함안 낙화놀이는 참나무를 이용하여 숯을 구워 숯가루를 내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낙화 감상으로 마무리된다. 2000년대 초에 들어와 진행된 놀이의 준비 과정을 보면 ‘나무하기─숯굴 파기─숯 굽기─숯 꺼내기─숯가루 내기─심지 만들기─낙화 만들기─줄 설치하기─꼬마전구 설치하기─낙화 걸기’의 순으로 이어진다. 낙화용 숯은 마을 인근 야산에서 참나무를 베어다가 마을의 공터에 숯굴을 만들고, 거기서 닷새 정도 구워 사용한다. 숯가루를 빻을 때는 입자의 크기를 조정하며 정성을 기울인다. 그리고 낙화 만들기는 마을 부녀자들이 참여하여 만드는데 이때 필요한 재료는 숯가루와 한지, 속 심지, 매듭용 광목끈 등이다. 한지는 가로 15㎝, 세로 30㎝ 정도의 크기이며, 낙화 한 개당 두 장의 한지가 필요하다. 심지의 크기는 가로 5㎝, 세로 30㎝ 정도로 만든다. 다음 이수정 연못 위에 줄을 설치할 때는 남성들이 뗏목을 타고 건너다니며 건다. 재질은 예전에는 새끼줄을 사용하였으나, 오늘날은 나일론으로 만든 와이어를 사용한다. 다음 낙화 걸기는 행사 당일, 뗏목을 타고 이동하면서 심지가 아래로 향하도록 하여, 대략 50㎝ 간격으로 건다.

낙화놀이의 준비가 모두 끝나면 본격적인 낙화놀이에 들어간다. 이때 먼저 고유제를 지내는데 놀이의 본격적인 시작을 고하는 축문을 낭독하고 마을이 대동단결하여 낙화놀이를 하게 된 기쁨과 그로 인한 운수대통함이 세세년년 이어지기를 천지신명에게 기원한다. 고유제가 끝나면 지역 유지들이 영송루 주변에서 낙화에 불을 붙여 점화식을 한다. 불을 붙일 때는 대략 길이 1m, 지름 5㎝ 정도 되는 생대나무 끝에 기름을 먹인 광목을 끼워 만든 횃불을 사용한다. 낙화 점화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뗏목을 띄워 연못 가운데의 낙화에 불을 붙인다. 천 개의 낙화에 불을 붙이는 데 소용되는 시간은 한 시간이 넘는다. 이후 낙화에 불이 붙고 나면 대략 두 시간 정도 낙화를 감상하게 된다.

특징 및 의의

낙화놀이는 대보름을 맞이하여 부정한 것을 쫓고 상서로운 것을 불러들이는 벽사진경의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며 놀이의 성격이 강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낙화놀이는 놀이 자체의 화려함을 즐기기도 하지만 그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공동체에 위협을 가하는 질병과 재액을 쫓고 경사를 부르는 벽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떨어지는 불꽃의 붉은 기운이 상서로움과 위안을 안겨다 주며 바람에 흩날리는 불씨는 놀이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축복이 내리는 듯한 감흥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낙화놀이의 준비 작업부터 전 과정에 걸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이웃과 더불어 하게 됨으로써 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현재는 지역 고유의 전통과 현실적 상황이 적절히 조화되면서 독특한 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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