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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객주 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끈으로 묶인 두 개의 구슬을 어느 한쪽으로 몰거나 몰린 구슬을 두 곳으로 옮기는 놀이.

내용

유객주留客珠는 한자말을 풀이하면 ‘손님을 머물게 하는 구슬’이란 뜻이다. 따라서 함께 가지고 놀기 위해 만들어진 놀이 기구가 아니라 특별하게 할 일이 없을 때 가지고 노는 놀잇감이다. 옛날에는 손님이 방문을 했는데 주인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손님에게 유객주를 주어 무료함을 달래게 했다고 한다. 놀이의 정확한 기원과 유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중국에서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로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놀이 재료가 고급스럽고 한가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기에 주로 지배층에서 즐겨 하였다. 이와 비슷한 유객환이란 놀이는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조조의 아들 조식이 만들어 아내에게 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널리 보급된 놀이로 여겨진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명맥이 끊어졌지만,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서양에서는 가정에서 하는 놀이이다.

한쪽 끈의 고리에 있는 구슬을 다른 쪽의 끈의 고리로 옮기거나 옮겨간 구슬을 다시 처음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게 하는 놀이인데 옮기는 방법이 쉽지 않다.

옛날에는 재질이 단단한 나무와 무명실이나 명주실로 만든 노끈을 사용했는데 요즘에는 이런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다. 놀이 도구는 가로 15㎝×세로 5㎝ 정도 크기로 두께는 3∼5㎜ 정도이고 구멍이 세 개 있다. 가운데 구멍은 넓게 뚫어서 실이 움직일 수 있고, 양쪽의 구멍은 작게 뚫어 실이 고정되게 한다.

이 끈에 두 개의 구슬이 있는데 직경 3∼5㎝ 정도의 크기이다. 끈은 길이가 60㎝ 정도인데 비교적 굵은 편이다.

 

유객주놀이
유객주놀이

 

  1. 놀이판을 왼손으로 잡고 그림의 가운데 부분을 앞으로 잡아당겨 공간을 만든다.
  2. 넓어진 공간으로 왼편의 구슬을 오른쪽으로 통과시킨다.
  3. 놀이판의 뒤편에서 가운데 구멍에 있는 두 줄을 함께 잡아당기면 구멍으로 두 개의 매듭이 따라 나온다.
  4. 두 매듭은 한 공간을 통해 구슬을 오른쪽으로 보낸다.
  5. 놀이판의 가운데 구멍 뒤편으로 보면 구멍 안으로 네 줄이 들어가 있다. 이 네 줄을 한꺼번에 잡아당기면 매듭이 따라 나온다.
  6. 이 매듭을 통해 구슬을 오른쪽으로 보내고 처음과 같은 상태로 끈을 조절한다.

반대편으로 보내려면 위와 같은 순서로 하는데 방향만 반대로 한다.

특징 및 의의

놀이 도구에 ‘유객留客’이 앞머리에 들어가는 유객주, 유객환, 유객판(칠교) 등은 모두 손님을 위한 놀이 도구이다. 이것들은 여럿이 할 수도 있지만 혼자서도 놀 수 있는 놀이 도구들이기도 하다. 문제 해결이 쉽지 않지만 풀었을 때의 기쁨과 성취감은 다른 놀이에서 얻지 못할 만큼 크다. 이런 도구들은 서양으로 전래되어 훌륭한 교육 도구로 활용되고 아직도 널리 행해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교육적 가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라 여겨진다. 따라서 기존의 놀이 도구를 분석하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켜 현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울산 마두희 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대보름 무렵에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는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

내용

대동놀이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거나 아예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마두희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서 『학성지鶴城誌』(1749),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보유慶尙道補遺 편 속의 『울산부읍지蔚山府邑誌』(1557∼1765),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속의 『울산부읍지』(1832), 『영남읍지嶺南邑誌』 속의 『울산부읍지』(1895), 『학성잡기鶴城雜記』(1902) 등 여러 읍지에 지속적으로 소개되었다. 이 가운데 『학성지』 풍속조에 실린 마두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唐의 발하희拔河戲와 같은 종류이다. 매년 단오端午에 병영과 부府의 거주민들에게 칡으로 꼰 줄을 많이 만들게 한다. 그날에 이르러 종루 앞길에 모이도록 하여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도록 명령하면, 같은 편 사람들이 각자 꼰 줄을 합하여 줄을 만들고 줄머리는 빗장의 걸쇠 모양을 만들어서 합환교결合歡交結하도록 한다. 또 두 사람에게 남자와 여자의 옷을 입도록 하여 남자는 동쪽, 여자는 서쪽 줄머리에 세운다. 양편 사람들이 줄을 메고 서로 어르다가 잽싸게 서로 결합하면, 남자와 여자가 각기 땅에 내려서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무리를 독려하여 서로 끌어당기도록 한다.

동쪽 사람이 흔들어서 서쪽 사람이 지탱하게 되면 서쪽 편이 이기고, 서쪽 사람이 흔들어서 동쪽 사람이 지탱하게 되면 동쪽이 이긴다. 또 양편 사람들에게 씨름을 해서 승부를 가리도록 한 다음에 칡줄을 태화나루의 사공에게 내주어서 배를 매는 말뚝으로 사용하게 한다. 대개 마두馬頭라는 것은 옛날부터 일컫기를, 동대산東大山의 한 줄기가 남쪽 바다 속으로 달리니 그 모양이 말머리와 같은데 원래 서쪽을 돌아보지 않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 흘러감을 싫어하여 줄로 그것을 끌어당김으로써 놀이를 삼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서쪽 편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동쪽 편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 기록을 바탕 삼아 마두희의 면모를 살펴보자. 먼저 대동놀이의 기원에 관한 담론은 대개 그 놀이의 전승을 합리화하는 기제로서, 토착적 해석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풍수지리의 비보압승裨補壓勝과 연관된 기원담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두희의 경우, “동대산의 한 줄기가 남쪽 바다 속으로 달리니 그 모양이 말머리와 같은데, 원래 서쪽을 돌아보지 않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 흘러감을 싫어하여 줄로 그것을 끌어당김으로써 놀이로 삼았다.”라고 한다. 마두희를 풍수지리적 형국론에 근거한 비보 행위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줄은 짚으로 만들지만 기존의 조사 자료와 문헌들을 살펴보면 칡과 삼, 굴피, 새, 대나무 등의 다양한 재료들이 줄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두희의 경우, 19세기 전반까지는 칡줄을 사용했지만 후반부터는 짚으로 줄을 만들었음이 『울산부읍지』(1895) 등 여러 읍지에 나타난다. 이 무렵에 일어난 또 하나의 변화는 줄을 당기는 시기가 단오에서 대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비교적 수도재배水稻栽培가 일반화한 19세기 중반 이후, 단오를 전후한 시기가 써레질과 모심기, 밭작물의 수확 등으로 줄을 당기기 어려운 농번기가 된 점 그리고 수도재배가 일반화한 결과 줄을 꼬기에 적합한 양질의 짚을 확보할 수 있게 된 점 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줄다리기의 연행 공간은 줄의 규모와 지리적 여건에 따라서 결정되게 마련이다. 내륙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넓은 논밭이나 큰길에서 줄을 당기고, 소규모일 경우에는 골목에서 줄을 당기곤 했다. 마두희의 경우, 연행 공간은 관아의 문루門樓였던 종루 앞이었는데, 이 길은 울산 고을에서 가장 큰 길이었다.

마두희의 편 구성 방식은 거주 지역에 따라서 동서로 편을 가르는 것이었고, 동서 양편은 각기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였다. 줄의 형태는 암줄과 수줄이 따로 있는 쌍줄이었으며, 각 편의 줄머리에는 각각 남복과 여복을 입은 사람을 태웠다. 18세기까지는 이 정도로 양편의 성별을 표상했지만 20세기 초의 자료를 보면, 동편은 남자 옷을 입고 서편은 여자 옷을 입게 하여(『학성잡기鶴城雜記』 풍속) 시간이 흐를수록 양편이 보다 더 분명하게 성性을 표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줄머리에 남녀복을 입은 사람을 태우고 서로 어르다가 암수줄을 결합하고 나면, 줄머리에 타고 있던 남녀가 땅으로 내려온 뒤에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이때 줄머리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각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자기편을 독려해 서로 끌어당기도록 함으로써 각 편의 패장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어느 한 쪽이 줄을 많이 끌어와서 상대편이 포기하면 승부가 결정됐다. 줄다리기의 승부가 결정되면 다시 씨름으로 승부를 가리는 과정이 존재했다. 씨름이 일종의 뒤놀이로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마두희는 암줄인 서편의 승리가 곧 풍년을 보장한다는 점세占歲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대부분의 줄다리기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마두희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세기 전반까지 단오에 줄을 당겼음에도 불구하고 연초에 하게 마련인 점세 행위가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서편의 승리가, 풍수지리적 비보행위로서 마두희의 의미망과 연계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마두희가 1920년대에도 비교적 활발하게 전승되었음이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울산읍내에서 舊陰 정월 15~16 양일간 삭전대회를 개최한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동서 양편의 편장과 위원들의 극력 활동으로 공전의 큰‘줄’을 만들어 장사진을 버렷는 바 소문이 廣布되여 3,40리 외에서 출전과 구경코저 참집한 자도 다多하야 수만의 군중이 회집하얏는데 兩陣의 旗鼓와 會衆의 함성은 전시가를 聳動케 하엿는데 初日은 동편이 得勝한 후일 서편이 勝捷하엿다 하며 각종 여흥과 농악으로 파진락을 秦하얏다더라.(蔚山)

  • 조선일보, 1926년 3월 4일자 기사

‘正初의 民衆娛樂’ 蔚山索戰
例年과가티 蔚山邑內에서는 舊正月十五,十六二日間索戰大會를 開催하기로 하야 目下東西兩軍은 各自必勝을 期하는 各般의 準備에 忙殺中이라는데 今年은 特히 大大的으로 晝間부터 始戰하야 一般觀光의 便宜를 與하리라더라.(蔚山)

  • 동아일보, 1929년 2월 23일자 기사

이들 기사를 통해 마두희가 이틀에 걸쳐서 삼판양승제로 열렸으며, 삼사십 리나 떨어진 지역에서 줄을 당기거나 구경하기 위해서 찾아올 정도로 성대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今年은 特히 大大的으로 晝間부터 始戰하야”라는 대목에서 1929년 전까지는 야간에 마두희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고, “동편이 得勝한 후일 서편이 勝捷하엿다 하며 각종 여흥과 농악으로 파진락을 秦하얏다더라.”라는 대목에서 줄다리기가 끝난 뒤 농악을 바탕으로 한 뒤풀이판이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마두희의 전승력은 약화되어, 고을 단위의 줄은 광복될 때까지 두 번 더 당기는 데 그쳤다. 광복 이후인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다시 고을 단위의 줄을 당겼지만 사회적 혼란과 6·25전쟁 등으로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 뒤 1980년대에 이르러 울산을 상징하는 전통놀이로서 마두희에 대한 관심이 커져, 재현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마두희는 2013년부터 울산광역시 중구에서 해마다 열리는 마두희축제의 중심적 연행으로 자리 잡고 새로운 전승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특징 및 의의

마두희의 지역성은 연행 시기가 19세기 전반까지 단오였다가 그 뒤 대보름으로 바뀐 점, 줄의 재료가 칡에서 짚으로 변한 점, 가장한 남녀를 줄 위에 올려 태워 줄을 어른 뒤 이들이 놀이 진행 과정에서 패장 노릇을 하게 한 점, 씨름을 뒤놀이로 배치한 점, 놀이의 결과에 따른 점세의 배경으로 풍수지리적 비보신앙이 자리 잡은 점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와 같은 면모는 한국 줄다리기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다양성을 파악하는 데 긴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못 치기 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쇠못이나, 나무 또는 대나무의 끝을 뾰족하게 해서 만든 못을 서로 쳐서 다양한 방법으로 따먹거나 겨루는 놀이.

내용

둘 또는 여럿이 어울려 할 수 있는데 주로 남자아이들이 많이 한다. 겨울철 벼베기가 끝난 빈 논이나 비가 오면 땅이 물러지는 곳이 놀이하기에 적당하다. 이 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못을 가지고 집을 짓거나 생활용구를 만들어 쓸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 놀이는 일본에도 전승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낸가라’, ‘냇기’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민간신앙, 즉 마을의 수호신인 신사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출산한 집 앞에서 아이들이 이 놀이에 쓰이는 나무를 가지고 작은 집을 만들어 세우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무엇을 염원하는 데서 이 놀이가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놀이 자체가 그 어떤 민간신앙과 연관되었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서는 전북 익산 지역 아이들이 이 놀이를 수시로 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충청남도편에는 놀이 방법을 줄긋기와 따먹기 두 가지로 나누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중에 특이한 점은 소년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들이 하는 놀이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밖에 최근에 발간된 『금산의 민속놀이』 등 여러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최근까지 행해진 놀이다.

놀이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상대방 못을 따먹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못이 박히는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여 상대방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따먹기를 할 때 못의 길이는 대못이고, 나무로 깎아서 만들 경우 쇠못보다 더 긴 것을 사용한다. 따먹는 못치기는 먼저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한다. 뒤 순서부터 차례로 땅에 못을 꽂아 둔다. 그러면 1등은 이 중에 하나를 골라 사선으로 내리친다. 만약 꽂아 둔 못이 쓰러졌는데 내리친 못도 쓰러지면 따지 못한다. 꽂아 둔 못이 쓰러지고 친 못도 꽂혀 있으면 한 번 더 해서 쓰러진 못이 움직이면 따게 된다. 지방에 따라서 쓰러뜨리고 자기 못이 땅에 박히면 따먹게 하기도 한다. 금긋기는 못을 따먹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내리꽂는 기술을 겨루는 놀이이다. 먼저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이긴 사람부터 차례로 못을 내리꽂는다. 두 번째는 처음 꽂은 지점과 직선으로 연결한다. 만약 다른 사람의 선 때문에 두 지점을 연결하지 못하면 선을 그을 수 없고 차례가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이 직선으로 연결할 수 없게 하면 이기게 된다.

못 치기 판
못 치기 판



특징 및 의의

물자가 귀할 때 못은 재활용되었고 아이들에게 놀이 도구로 중요한 재산이었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려면 못이 있어야 하기에 못을 주우러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큰 못을 여러 개 가진 큰 아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큰 아이들은 여러 개 있기에 따먹기를 했지만 작은 아이들은 금긋기를 통해 정확하게 꽂는 기술을 연마했다. 요즘은 대부분 못이 아이들에게 위험하다고 하여 못을 구경하기 힘들어졌고 무른 땅도 찾을 수 없어 사라진 놀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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