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무동 답교 놀이 정의, 개관,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정월대보름 밤에 무병장수를 빌며 하던 답교놀이(다리밟기)에 조선시대 정조의 화성 원행 때 과천을 경숙經宿하는 것에 맞추어 원행을 환영하기 위해 행하던 무동놀이를 가미한 민속놀이.
개관
답교놀이는 정월대보름 밤에 동네 다리 위를 오가며 한 해의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전국적인 풍속 중 하나이다. 과천 무동 답교놀이는 정월대보름 무렵 현륭원으로 향하는 정조의 원행을 환영하고 선친에 대한 효행을 칭송하기 위해 답교놀이에 화려한 무동을 꾸며서 춤과 놀이를 가미한 것이다. 정조가 선친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영우원에서 화성 현륭원(현 융릉)으로 옮기고 나서 원행이 잦았는데, 참배하러 가는 길에 과천에 행궁을 설치하고 머무르면서 놀이가 유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놀이가 중단되었으나 1981년 이윤영李允榮을 중심으로 과천 토박이들이 참여한 과천민속보존회에서 재현하였고, 이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와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장려상, 우수상 등을 수상하였다. 과천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재연되다가 200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과천의 세시놀이는 정월대보름에 집중되어 있어 지신밟기, 무동 답교놀이, 달맞이, 불싸움, 돌싸움, 농악놀이 등이 유기적으로 놀아지므로 이들 놀이를 독립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1981년 과천민속보존회에서 무동 답교놀이가 복원된 후, 1994년 당나무고사·우물고사·다리고사·마당놀이·선소리 등을 가미한 것이 현재에 이른다.
과천 무동 답교놀이는 답교놀이를 하면서 일종의 무동극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을 담당하는 인물들이 편성된다. 기본적으로 길을 안내하는 길라잡이와 농기와 영기 등을 든 기수를 선두로 호적·꽹과리·징·제금·장구·북·소고 등으로 편성된 농악대가 따르고 그 뒤를 잡색과 무동들이 따른다.
잡색으로는 포도대장·왜장녀· 남장녀·양반광대·과천댁·집사·촌장·도령 등이 있다. 포도대장은 전복을 입고 전립을 쓰고 목화를 신고 부채나 방망이를 든다. 왜장녀는 큰 머리를 얹고 가슴을 내놓을 정도로 치마를 짧게 두르고 과장된 엉덩이춤을 추며, 남장녀는 탈춤의 마당쇠처럼 탈을 쓰고 손에 소고를 든다. 양반광대는 흰색 도포를 입고 정자관을 쓰며, 과천댁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술동이를 들고 다니고, 집사는 누런 도포를 입고 큰 갓을 쓴다. 촌장은 흰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큰 갓을 쓰며, 도령은 남색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쓰고 부채를 쥔다.
무동은 애기무동과 밑무동이 있는데, 밑무동이 애기 무동을 어깨에 올리고 춤을 추며 논다. 애기무동으로는 소승무동, 여무동 둘, 별감무동, 나장무동, 팔복무동 여섯이 있다. 소승무동은 장삼에 가사를 두르고 여무동 사이를 오가며 희롱을 하고, 여무동 둘은 노랑 저고리와 녹색 저고리를 나눠 입고 소승무동을 유혹하는 춤을 춘다. 별감무동은 홍포에 초립을 쓰고 합죽선을 들으며, 나장무동은 경포를 입고 각모를 쓰고 붉은 방망이를 쥐었는데, 별감무동과 나장무동은 여무동을 희롱하는 소승무동을 제지하는 역할을 한다. 팔복무동은 연두색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고 벙거지를 쓰고 부채를 든다. 이에 따른 밑무동 여섯 명은 흰 바지저고리에 상투를 쓰고 짚신을 신은 농부 차림이다. 놀이의 구체적인 연행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당나무고사: 선두에 선 길라잡이가 놀이패를 당나무 앞으로 이끌고, 당나무 앞에 황렬로 선 놀이패와 마을 사람들은 상쇠의 신호에 맞춰 정중히 삼배를 하며 한 해의 무사태평을 빈다.
- 지신밟기와 우물고사: 한 마을을 상징하는 기와집, 대감집, 초가집, 우물을 만들어 놓고, 먼저 집들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지신밟기를 대신한다. 지신밟기를 하고 나서 마을 중앙에 있는 공동 우물로 가서 풍물을 치며 돌다가 상쇠가 ‘맑은 물이 잘 나오도록 해 주십사.’ 하는 내용의 고사 덕담을 한다. 우물고사를 지내는 동안 모인 사람들은 우물에 절을 하며 기원을 함께 하고, 밑무동은 애기무동을 태우고 춤을 추기도 하고, 잡색들은 장난스러운 춤을 추며 어울린다.
- 다리고사: 지신밟기와 우물고사를 마친 놀이패가 다리로 이동하여 다리를 중심으로 둘러서서 자리를 잡는다. 주과포혜를 기본으로 하는 제상을 차려 놓고, 축관이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나서 촌장과 마을 유지들과 함께 소지를 한다.
- 마당놀이: 다리고사를 마친 놀이패들은 길라잡이를 선두로 하여 넓은 마당 한가운데서 신명난 판을 벌인다. 풍물에 맞춰 큰 원을 돌다가 두 개의 원을 만들기도 하고, 오방진을 감았다가 풀고, 네 개의 줄을 만들어서 네 개의 원을 만드는 사통백이, 전후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좌우치기 등 다양한 진풀이를 펼치면서 신명나는 마당놀이를 벌인다.
- 선소리 답교: 마당놀이가 끝나면 선소리꾼들이 다리 위에 올라가 놀량, 앞산 타령, 뒷산 타령, 잦은 산타령, 개구리 타령 등을 부른다. 선소리꾼 중에 모갑이는 장구를 메고 앞소리를 메기며, 다른 선소리꾼들은 소고를 들고 장단을 치고 춤을 추며 뒷소리를 받는다. 선소리꾼들이 다리 위에서 소리를 하는 동안 잡색들은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익살을 부린다.
- 무동 답교놀이: 선소리꾼들이 다리 위에서 내려오면, 다리 위에는 밑무동들이 각각 소승무동, 여무동 둘, 별감무동, 나장무동, 팔복무동을 어깨 위에 태우고 올라간다. 밑무동들이 풍물 장단에 맞춰 좌우치기, 밀치기, 마당일채 대형에 앉았다 일어났다 동작을 하면, 밑무동 어깨 위에 올라간 무동들은 깨끼춤, 자라춤, 양반춤 등의 춤을 춘다. 풍물 장단에 맞게 밑무동과 함께 추는 춤 외에 무동들은 자기 복장과 역할에 맞는 춤을 추는데, 소승무동은 여무동 사이에서 희롱하듯 날렵하고 간드러진 춤을 추고, 여무동들은 요염한 자태로 소승무동을 부르며 제자리에서 춤을 춘다. 별감무동과 나장무동은 손에 든 합죽선과 방망이 등을 들고 춤을 추고, 팔복무동은 포졸 역할을 하며 춤을 춘다. 무동 답교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다리 앞에서는 잡색들이 무동놀이를 흉내 내다가 실패하여 보는 사람들의 웃음을 사기도 하고, 부채나 옷자락 등을 이용하여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기도 한다. 무동 답교놀이가 끝나면 풍물패를 선두로 하여 다리밟기가 시작되고 잡색, 무동 그리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풍물패 뒤를 따르며 다리를 밟으며 건너간다.
- 마무리 및 소원 빌기: 답교놀이가 끝나면 집과 우물과 다리를 한 바퀴 크게 돌며 무동 답교놀이를 마무리한다. 무동 답교놀이가 마무리 될 무렵에 마을 사람들은 짚불놀이를 하게 된다. 이 짚불놀이는 자기 나이 수대로 짚뭉치를 엮은 다음 불을 붙여서, 대보름달을 보고 “달님 절합니다.”라고 읊으며 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각자 소원을 비는 것이다.
특징 및 의의
과천 무동 답교놀이는 다른 지역과 같이 매년 정월대보름에 풍년과 무병장수를 비는 차원에서 하던 답교놀이에, 왕의 원행을 맞이하기 위해 무동놀이를 결합하여 색다른 답교놀이로 발전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남도의 강강술래가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과 결부되어 그 유래가 강화되고, 안동의 놋다리밟기가 고려시대 공민왕의 몽진蒙塵이라는 사건과 결부되어 그 전승력이 강화된 것과 같이 과천의 무동 답교놀이 역시 조선 정조의 화성 원행과 맞물려 그 유래와 전승력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과천 무동 답교놀이에 등장하는 잡색과 무동은 조선 후기 발달한 연희농악과 탈춤에 나오는 잡색과 탈꾼들의 행동과 성격을 상당 부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답교놀이에 다양한 잡색을 포함한 무동놀이를 결합한 과천 무동 답교놀이는, 문화가 상황에 따라 어떻게 확장되고 변화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초중종 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시조나 한시, 삼자시三字詩 등에서 특정한 부분을 말하면 그에 해당하는 내용 중 나머지를 외거나 바닥에 있는 해당 구절을 가져오는 놀이.
내용
글자를 알고 있어야 하기에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쉴 짬을 이용해 많이 하던 놀이로 ‘초중장놀이’라고도 한다. 화가투와 비슷하나 화가투가 시조에 국한되었다면 이 놀이는 시조를 포함해서 음률이 있는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놀이 도구가 있을 때도 있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일성록日省錄』에 정조가 세자의 학습 정도를 묻는 내용이 있는데 신하에게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날마다 『당음唐音』을 외우고 있는데 어느 시詩의 어느 글자이든 한 번 보기만 하면 마치 세상에서 말하는 초중종初中終놀이처럼 전구全句를 암송하곤 한다. 이것을 가지고 보면 문자에 관한 일은 별로 힘쓰지 않아도 잘 할 것도 같다.
위의 내용을 보면 왕실을 비롯하여 양반가 자제들이 이 놀이를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에도 이 놀이에 대한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시인이며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옥봉 백광훈은 11세에 초중종의 음률에 자작시를 지어 주위의 찬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구한말의 놀이 기록인 『한국의 놀이』에는 ‘Tcho─tyoung─tjyang’이라고 영문으로 이 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한자 책을 펴 놓고 중국의 고전 송시의 첫 글자를 찾아 이를 많이 기록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하며, 따라서 당시唐詩를 많이 아는 사람이 유리하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초중종놀이는 조선시대에 글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보편적인 놀이로 추정된다. 이후 서원이나 서당에서 한시나 시조 등을 자작自作하기에 앞서 선대의 좋은 글귀를 외기 위해 많이 한 놀이다. 공부를 많이 한 이가 특정한 소절을 외면 이를 알고 있는 아이가 나머지를 외는 일 대 다수의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고, 패를 나누어 각 편의 대장이 상대편에게 문제를 내는 방식으로도 진행된다.
특징 및 의의
이덕무의 『사소절』에 놀이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내용이 있다.
어린이들은 거개가 글 읽기 싫어하고 어른이 시키는 일 하기는 창피스러워하면서, 모든 오락에 있어서는 권하지 않아도 잘하고 가르치지 않아도 열심히 한다. 장기[象戲]·바둑[圍棋]·쌍륙雙陸·골패骨牌·지패紙牌·윷놀이[擲柶]·의전意錢·종정도從政圖놀이·돌공던지기[擲石毬]·팔도행성八道行成 등을 모두 환히 알면, 부형과 벗들은 재주가 있다고 그를 칭찬하고 잘하지 못하면 모두 그를 조소하니 어찌 그리도 고질스러울까? 이런 놀이들은 정신을 소모하고 뜻을 어지럽히며 공부를 해치고 품행을 망치며 경쟁을 조장하고 사기邪氣를 기른다. 심지어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형벌까지도 받게 된다. 그러니 부형된 자는 엄금하여 오락 기구를 혹 숨겨 두는 일이 있으면 불태우거나 부숴 버리고 매 때려 주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비단 이덕무뿐 아니라 당대 양반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양반이라도 아이인지라 공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공부에 도움이 되는 놀이가 생겨났는데 벼슬에 대한 이해를 돕는 승경도놀이(종경도), 각 지역의 명승지를 알게 하는 남승도놀이, 지방의 위치며 특징을 익히는 고을모둠 등이 그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 놀이도 학습을 돕는 놀이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어깨동무 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어깨에 서로의 팔을 얹고 나란히 걷거나 그렇게 하며 노는 아동 놀이.
내용
어깨동무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문헌 자료가 빈약한 관계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날의 어깨동무와 일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서거정徐居正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인 『동문선東文選』(1478) 제14권에 실린 시를 통해 이 놀이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천덕(금金의 해릉왕海陵王 연호) 당년에 귀밑머리 파란 소년들
어깨동무로 가는 곳마다 정답게 놀았지
밤마다 잠들면 백련사 꿈을 꾸었건만
반생을 황각의 공명에 그르쳤구나
선정을 파하고 몸 기울이니 솔 사이 흰 달
재 끝난 뒤 발 씻기는 돌틈의 샘물
붉은 낙엽으로 절문 앞길을 봉하지 마소
벼슬을 내던지는 날 내가 혹시 찾아가리
天德當年鬢兩靑 肩隨處處幾論情
白蓮魂夢無虛夕 黃閣功名誤半生
定罷側身松月白 齋餘洗足石泉淸
莫敎紅葉封苔徑 投劾他時倘可行
일제강점기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 어깨동무 관련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심훈이 쓴 소설 『상록수』가 대표적인데, 이 소설의 「반가운 손님」 편을 보면 “계집아이들은 명절 때처럼 울굿불굿하게 입고 어깨동무를 하고 학원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어떤 계집아이는 추석놀이를 하던 날 밤에 꽂았던 풀이 죽은 리본을 꽂고 자랑스럽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녔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친구 혹은 친한 사이끼리 상대방의 어깨에 서로 팔을 얹는 단순한 놀이라는 사실에서 보면 어깨동무의 역사가 오래되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실제로 사전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이 놀이가 생겨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비록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어깨동무는 최근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이 놀이를 접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는 보통 관계가 아니다. 서로가 친밀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 거리낌 없이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올린 다음 발걸음을 맞춰 걸어가기도 하며, 심지어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서로의 친밀감은 무척 중요하다. 교육 과정에서 협동심과 단결력을 키우기 위해 일부러 서로가 어깨동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깨동무는 두 명 이상이면 놀이가 가능하지만 특별히 시간을 내어 즐기는 경우가 드물다. 친구들끼리 학교를 오가면서 자연스레 행하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 먼저 어깨동무를 하자고 제안을 할 경우도 있겠지만 걸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가 많다. 그런 탓에 놀이의 소요 시간과 방법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놀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깨동무를 하고 걸음을 맞춰 가며 대화를 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해안가에서는 친구들끼리 어깨동무를 한 채 모래밭을 뛰어다니거나 물속으로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놀이 자체가 복잡하지는 않지만 어깨동무를 한 채 걸음걸이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일명 <어깨동무노래(동요)>가 그것인데, 비교적 여러 지역에서 이 노래가 전승되고 있다. 지역에 따라 조금 차이를 보이지만 잘 알려진 노래가 바로 <어깨동무 내 동무>이다.
대표적인 가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어깨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놀아라
동무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놀아라
충북 음성 지역에서는 “동무동무 시 동무/ 질라리비 훠이훠이, 질라리비 훠∼이/ 목화밭에 턱구렁이”라는 노래가 전해 온다.
특징 및 의의
어깨동무는 친분이 있는 아이들이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걸어가며 즐기는 놀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론 노래를 부르기에 단순해 보이지만 놀이 과정에서 서로의 친밀감을 느끼고 협동심과 배려하는 마음을 기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놀이가 분명하다.
'신나는 전통 고전 게임 & 놀이 탐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아깨비놀이, 부여 유왕산놀이, 청양 범놀이 알아보기 (0) | 2025.04.08 |
---|---|
유객주 놀이, 울산 마두희 놀이, 못 치기 놀이 알아보기 (0) | 2025.04.08 |
멍석말이놀이, 그림자놀이, 투란희 놀이 알아보기 (0) | 2025.04.08 |
장치기 놀이, 고을모둠 놀이, 깡통 차기놀이 알아보기 (0) | 2025.04.08 |
풀싸움 놀이, 석천 농기 고두마리 놀이, 제주 약마희 놀이 알아보기 (0) | 2025.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