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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발 뛰기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멀리 열 발을 뛴 다음 술래에게 잡히지 않고 다시 되돌아오는 놀이.

내용

열 발 뛰기놀이와 관련된 문헌 자료가 많지 않아 이 놀이가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전통놀이와 달리 놀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규칙을 숙지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생각보다 이 놀이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열 발 뛰기놀이는 마당이나 마을의 공터와 학교 등에서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넓은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참가 인원은 대개 5∼10명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술래를 정한다. 술래는 한 명이 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두 명인 경우도 있다. 두 명을 뽑는 이유는 놀이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서이다.

명칭이 열 발 뛰기놀이라고 해서 반드시 열 발만을 뛰는 건 아니다. 술래로 뽑힌 사람이 명하는 숫자에 맞춰 멀리 뛰면 된다. 다섯 발이 될 수 있고 일곱 발을 뛸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놀이를 ‘세 발 뛰기놀이’라 부르는 지역도 있다. 그리고 술래로 뽑힌 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 발을 덜 뛰어 맨 처음 뛴 자리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을 수비를 한다. 수비가 아닌 사람들도 무작정 멀리 뛰기보다는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하여 적당하게 뛰는 것이 중요하다. 이 놀이의 방법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긴 하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출발선에 금을 긋고 술래를 한 명 정한다. 술래를 정할 때는 가위바위보로 한다.
②술래는 출발선에 선다. 그러고 나면 술래를 뺀 다른 사람들은 출발선에서 한 발 뛰어나간 다음 표시하고 뒤돌아온다.
③술래는 출발선에서 손을 뻗어 다른 어린이들을 친다. 술래의 손에 닿으면 그 사람이 술래가 되고 못 치면 한 발 안에 출발선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만약 출발선을 밟거나 못 들어오면 술래가 된다.
④술래가 아무도 잡지 못할 경우 한 발씩 앞으로 더 나아가고 술래는 다른 사람보다 한 발 덜 나아간다. 다음은 두 발 뛰어가서 처음과 같이 하고 술래는 한 발 뛴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친다.
⑤세 발에서는 술래는 두 발, 네 발에서는 세 발로 술래는 다른 사람보다 항상 한 발 적게 뛰어 친다.
⑥만약 다섯 발에서 술래에게 채이면 다름 술래는 처음 한 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발부터 하게 된다.
⑦열 발이 다 되면 술래의 주문대로 나머지 사람들은 맨 처음 출발한 곳으로 들어와야 한다.

술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열 발을 뛰고 나면 술래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문을 하는데, 주문하는 내용은 지방마다 가지각색이다. 오리걸음과 토끼뜀, 그리고 코끼리걸음처럼 주로 동물 흉내가 많다. 도둑발과 신호등을 주문할 때도 있다. 그러면 술래를 제외한 사람들은 주문한 내용에 맞춰 출발선으로 되돌아온다. 가령 오리걸음이 주문일 때는 오리걸음을 한 채 꽥꽥거리며 출발선으로 오고, 도둑발 주문일 때는 술래가 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움직여 출발선으로 돌아온다.

술래의 주문에 맞춰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내용이 있다. 바로 술래가 치려고 하면 반드시 멈춰야 하는 것이다. 멈추면 술래가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움직이다 술래에게 치이면 그 사람이 다음 번 술래가 된다. 이 과정에서 술래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잡으면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한다.

특징 및 의의

열 발 뛰기놀이는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놀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술래가 주문하는 내용에 맞는 행동이나 소리를 내며 돌아온다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리고 신체 활동을 비롯해 나름대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탓에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놀이이다.

울진 놀쌈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경상북도 울진의 죽변과 후포, 기성 지역의 어부들이 바다에서 벌인 경주競舟.

내용

놀쌈은 놀과 싸움의 합성어로서 ‘놀’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나운 큰 물결’을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놀의 파생어로는 ‘놀사공’이 있는데, ‘사나운 바다에서 배를 부리는 사공’, 즉 어부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놀쌈은 ‘바다에서 어부들이 파도를 헤쳐 나가며 벌이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죽변의 놀쌈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에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이후에 크게 한 번 열렸다. 그리고 1957년에 마지막으로 열리고 나서 전승이 단절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놀쌈은 양력 7∼8월에 벌어졌다. 죽변어업조합에 속하는 각 마을이 참가했는데, 배는 댓마였으며 약 200m 거리를 왕복해서 먼저 들어오는 쪽이 이겼다. 당시에는 놀쌈뿐만 아니라 수영, 잠수, 물고기 엮기 등의 시합도 함께 벌어졌다. 1957년에 마지막으로 벌어진 놀쌈은 양력 5∼6월쯤에 벌어졌는데, 경주용 배는 ‘야거리’로서 다섯 명이 승선, 100m 남짓한 거리를 왕복해서 먼저 들어오는 배가 이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후포의 경우, 태평양전쟁 시기에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이후에 다시 시작되어 1960년대 초반까지 전승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놀쌈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벌어졌는데, 후포항의 등대를 먼저 돌아오는 마을이 이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등대에는 심판관이 있어 공정하게 경주가 진행되도록 했다. 경주가 벌어지는 동안 주민들은 마을 대표로 나간 배가 선전하도록 응원했으며, 우승한 마을에는 많은 상품이 주어졌다. 한편 광복 뒤에 전승된 후포의 놀쌈은 3년마다 한 번씩 벌어지는 별신굿의 마지막 날에 벌어졌다. 후포어협에 속하는 마을들이 참가했으며, 사용한 배와 경기방식은 죽변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울진 지역 연안에서 어민들에게 중요한 놀이였던 놀쌈이 언제부터 어떤 목적으로 열렸는지 현재로선 확인한 길이 없다. 그리고 죽변과 후포, 기성 모두 놀쌈이 일제강점기에 조직된 어업조합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 일본 열도에서 널리 전승된 배 경주와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이 또한 확인하기 어렵다.

지 역사례
놀쌈은 울진의 죽변과 후포, 그리고 기성 지역에서 전승되었다. 죽변과 후포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죽변의 놀쌈: 1957년까지놀쌈은 죽변항 앞바다에서 열렸는데 ‘노젓기 시합’이라고도 불렀다. 경기를 주최한 것은 죽변어업조합으로서 늦봄이나 초여름에 행사를 개최했다. 참가는 조합에 속한 어촌계 단위로 이뤄졌다. 보통 대여섯 마을이 참가하고 선원은 한 마을당 다섯 명이었다. 1957년의 경주에 사용한 배는 ‘야거리’였다. 야거리는 ‘돛배’ 또는 ‘야돛대’라고 불렀는데, 크기는 길이 5∼6m, 폭 2m 정도였다. 돛은 광목에 천연 염색을 해서 만들었다. 놀쌈에 참가할 때는 돛대에 그림을 그리거나 오색기를 배 곳곳에 매다는 등, 배를 치장하는 데 신경을 썼다.
    놀쌈을 할 때 다섯 명의 선원이 타는데 역할 분담이 중요했다. 승선한 이들이 모두 노를 저었지만 선원이 자리한 위치에 따라 역할이 달랐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는 배의 후미에서 노를 젓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사공’이라고 불렀다. 사공은 총책임자로서 배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면서 노를 저었다. 나머지 선원은 배의 앞에 두 명, 뒤에 두 명이 양쪽으로 앉아서 노를 저었다. 뒤에서 노를 젓는 사람을 ‘한참몰이’라고 했는데, 배의 추진력이 이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체력이 좋은 건장한 청년들이 맡았다. 한편 앞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옆참몰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노를 저으면서 사공의 지시를 받아 배의 방향을 조절하는 역할도 했다. 이에 따라 ‘옆참몰이’는 보통 승선 경험이 많은 사람이 맡았다.
    놀쌈은 출발점에서부터 목표 지점까지 갔다가 먼저 돌아오는 편이 이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출발점은 보통 해안선이었으며 목표 지점은 해안선에서 100m 이상 떨어진 곳에 부표를 띄워서 표시했다. 경주에 참여하는 배들은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다가 출발 신호가 들리면 ‘상앗대’로 바닥의 모래를 찍어 배를 물에 띄운 뒤노를 세차게 저으며 나아갔다.
    놀쌈이 있는 날이면 주민들이 모두 나와 풍물을 치면서 자기 마을의 배를 응원했다. 조합에서는 술과 음식을 제공했으며, 주민들은 이 음식을 먹으면서 놀쌈이 끝난 뒤까지 놀이판을 벌였다.

  2. 후포의 놀쌈: 1960년대 초반까지 후포어업조합 산하의 마을들이 모여 놀쌈을 했다. 놀쌈은 후포에서 별신굿이 열리는 해에 개최되었다. 후포리에서 별신굿이 열리면 각 마을 어촌계에서는 선수단을 구성해 놀쌈을 벌였다. 경기 장소는 후포항이었다. 경주가 열리는 날에는 각 마을의 주민들이 몰려들어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놀쌈에는 ‘야거리’나 ‘돛배,’ ‘야돛대’라 부르는 무동력 목선을 이용했다. 이런 배들은 오로지 노 젓는 힘과 풍력으로 움직였다. 경기에 사용되는 배는 ‘알배’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어구와 돛을 내려 배를 가볍게 하고 노를 젓는 선원들만 승선해서 참가했다. 놀쌈에 참여하는 선원은 어촌계원 중에서 노를 잘 젓고 건장한 사람으로 선발했다. 배의 규모는 길이가 약 5∼6m, 폭이 2m 정도였다. 배에는 보통 다섯 명이 탔다. 배 후미에 자리한 사공이 노를 잘 저어야 옳은 방향으로 빨리 나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을 사공으로 배치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배의 양쪽으로 나누어 선수船首 쪽에 두 명, 선수와 선미船尾 사이에 두 명이 앉아 노를 저었다. 선수 쪽에 앉은 사람들은 사공의 지시에 따라 배의 방향을 전환했다.
    배들은 모두 출발선에 정렬해 있다가 신호와 함께 출발하여 목표물을 돌았다. 목표물은 주로 부표를 띄워 표시했으며 출발선으로 먼저 돌아온 팀이 승리했다. 배가 출발하면 사공의 지휘를 받으며 힘차게 노를 저었다. 여러 척의 배가 동시에 기를 펄럭이며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특징 및 의의

1960년대 초반까지 경북 울진의 해안 지역에서 전승된 배 경주로서 마을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축제성을 지닌 채 전승된 드문 사례이다.

풍등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서당의 생도들이 동짓날 저녁 이웃 서당의 생도들과 등불싸움을 시작할 때 출발 신호로 대형 풍선을 공중에 띄우는 놀이.

역사

풍등風燈은 중국에서는 공명등孔明燈이라고 하며, 대만에서는 천등天燈이라고 부른다. 중국 공명등의 유래를 보면 제갈공명이 중국 삼국시대 때 전쟁을 치르면서 상대 진영에 포위되어 곤경에 빠진 뒤 성을 빠져나갈 도움을 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공명은 바람의 방향을 계산한 뒤 떠다닐 수 있는 초롱을 만들고 거기에 구원 소식을 매달아 날려서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한다. 그 후 이것을 공명등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상남도 지역의 서당 생도들이 동짓날 저녁에 등싸움을 하면서 풍등을 만들어 놀았다고 한다. 등싸움은 서당의 생도들이 이웃 서당의 생도들과 등불을 가지고 싸움하는 놀이로서 초롱쌈이라고도 한다. 등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등제燈祭를 드리는데, 서당의 대궁(보)에 ‘○○서제지구書齊地區’라고 써 붙이고, 간단한 잔치를 끝내고 나서 등싸움 장소로 출발한다. 이때 풍등風燈을 올려서 신호로 삼는다. 한편으로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에도 군과 군 사이의 신호 연락용으로 풍등이 사용되었다. 풍등놀이는 현재 경남 통영統營에서 개최되는 한산대첩축제閑山大捷祝祭에서 전승되고 있으며, 등의 규모나 모양은 옛것을 본뜨고 있다.

내용

서당의 생도들이 사용한 풍등은 대나무와 한지로 제작하는 풍선이다. 풍등은 뚜껑이 없는 종이등에 불을 붙인 후 뜨거운 공기가 안에 가득 차면 등이 공중에 떠오르는 기구氣球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즉 풍등을 바람에 날려 보내기 전에 불을 붙이면 등 안쪽에 불이 타는 동안 뜨거운 공기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발생하는 대류 현상으로 온도가 올라가 등의 부피가 팽창된다. 이때 등을 놓으면 천천히 하늘로 솟아오른다.

출발 신호로 올린 풍등은 그 다음 펼쳐질 등불싸움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등불싸움은 대개 이웃 서당의 생도들과 사전에 미리 대전할 장소(대개 시장터)를 정해둔다. 이때 싸움에 사용할 등燈을 앞세우고 행렬을 이루며 나아간다. 등의 행렬은 1등燈, 2등燈, 3등燈의 순서로 나아가며, 개인별로 초롱등을 하나씩 들고 간다. 싸움 장소에 도착하면 각각 진을 치고 임전 태세에 들어가는데, 자신들이 온 방향에 따라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는 것이 보통이다. 진을 치는 모습을 1등을 가운데 세우고 놀이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 주위에 둥글게 모여서 1등을 호위하여 지킨다. 그리고 다시 2등과 3등을 든 사람들이 둘러서고, 가장 바깥쪽에 초롱꾼들이 이중, 삼중으로 원형을 만들어 1등을 지킨다. 이렇게 진을 치면 심판은 밥주걱 두 개를 세 번 부딪치며 놀이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면 서당꾼들은 “자∼” 하는 소리를 지르며, 두세 자尺 정도의 막대기를 가지고, 상대방 진의 중앙에 있는 1등의 촛불을 향하는데, 촛불을 먼저 끄는 편이 승리한다. 따라서 풍등놀이는 등불싸움의 전초전으로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놀이라 할 수 있다. 이 신호를 통해 등불이 행렬을 시작하고 싸움이 벌어지는데, 승부는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특징 및 의의

풍등은 제갈공명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서당의 생도 및 군사 신호로 사용됨으로써 소통의 매개로 인식되었다. 오늘날은 일반 사람들이 행복을 바라는 마음과 성공을 이루고자 기원하는 마음에서 풍등놀이를 즐긴다. 많은 사람의 소망과 복을 기원하는데 사용함으로써 대중적인 놀이문화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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