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봄날 들녘에서 삘기를 뽑아 먹던 기억이 있다면, 그 향긋한 단맛이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삘기 뽑기놀이는 단순한 유희를 넘어 생태와 계절에 기대어 형성된 생활문화였다.
마찬가지로 울산 매귀악은 공동체의 안녕을 빌며 풍물과 신앙이 어우러진 복합 의례로, 지역 정체성을 담고 있다.
잊혀져가는 전통놀이는 지금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삘기 뽑기놀이 정의
봄에 띠(삘기)의 새순이 올라오면 아이들이 그것을 뽑아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의 것을 파먹는 놀이.
삘기 뽑기놀이 내용
봄이 되어 새순이 나오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여러 풀로 놀이를 한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풀을 채집해서 정해진 규칙에 의해 따먹는 놀이를 했는데 띠도 그 중에 하나이다. 띠는 원래 명칭이 ‘삐’였는데 일제강점기에 ‘띠’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 삐비·삘기·띠기·삐리·삐래기·삔디기·뽀비·피기 등으로 불린다. 어린 순은 아이들이 먹기도 하는데 씹으면 향긋하고 달다. 씹어서 단물만 빼먹고 찌꺼기는 뱉어 버린다. 연중 음력 3월 전후로 어린 꽃이 고개를 내밀어야 할 수 있는 한시적인 놀이이다. 이때가 지나면 억세져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에 띠가 막 올라와야 놀 수 있다.
삘기를 가지고 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삘기 대를 손톱으로 짜서 이슬방울 같은 풀물이 나오면 두 아이가 서로 짠 곳을 대고 그 물방울이 옮겨가는 쪽이 이긴다. 잔디 줄기로도 이와 같이 한다. 이 방법은 따먹기보다는 재미로 한다. 다른 하나는 본격적인 놀이로 삘기를 10여 개를 쥐고 돌리면서 땅바닥에 흩으면 삘기 대끼리 걸쳐진 빈 공간이 생긴다. 여기에 삘기를 여러 개 쥐고 흩어진 다른 삘기에 닿지 않고 땅에 세우면 그 수만큼의 삘기를 주는 방식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서로 엉키면서 공간(밭)을 크게 만드는 것이다. 밭이 클수록 많은 삘기가 들어가 상대편 것을 많이 따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 크면 10여 개, 작으면 3∼4개 정도를 넣는데 작은 공간에 많이 넣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넓음에도 불구하고 조심성이 많아 조금밖에 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삘기를 집어넣은 아이도 긴장되지만 다른 것을 건드리지 않는지를 보느라 숨을 죽여 가며 보다가 건드리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이는 잃지 않고 자기 차례가 되기 때문이다. 잘하는 아이는 주변 모든 아이들의 삘기를 다 따서 한 바구니를 모으기도 하지만 잃은 아이는 또 다시 들로 산으로 가서 삘기를 따 와야 한다.
삘기 뽑기놀이 특징 및 의의
삘기 뽑기는 대나무 잔가지로 노는 ‘숨놀이’와 가지를 바닥에 흩뿌려 놓는 것, 놀이 방법 등이 같다. 다만 재료에 있어서 삘기는 특별한 가공을 하지 않고 주위에서 찾아오면 되지만, 대나무 숨은 일단 대나무를 베고 잘게 짤라 다듬어야 한다. 그밖에 성냥이 귀할 때 성냥 따먹기를 했는데 놀이 방법은 위와 같다. 놀잇감의 형태가 비슷하면 특정한 놀이에서 활용되는 방법을 적용하여 논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삘기 뽑기나 숨놀이, 성냥 따먹기와 같은 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삘기가 더 이상 주전부리가 되지 못하고, 대나무를 다듬어 숨을 많이 가져도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으며 성냥은 라이터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울산 매귀악 정의
울산 지역에서 섣달부터 정월대보름까지 풍물을 바탕으로 전개된 벽사 의례이자 새해맞이 축제.
울산 매귀악 내용
울산의 매귀악은 세말연초에 벌이던 민간 나례의 일종이다. 1749년(영조 25)에 권상일權相一(1679∼1759)이 편찬한 울산의 지방지인 『학성지鶴城誌』에는 매귀악에 관한 ## 내용이 비교적 충실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의 기록과 후대의 지방지를 참고하여 울산 매귀악의 절차와 ##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매년 섣달에 마을 내의 한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겨서 종이기[紙旗]를 만들게 하여 뜰 가운데에 세우고, 젊은 놀이패로 하여금 각기 징과 북을 가지고 달 밝은 밤에 그 아래에 둘러서서 그 악樂을 익히니 언시諺詩에서 말하는 ‘매귀습’이라는 것이다. 每歲季冬似洞中一人使掌其務作紙旗竪于庭中年少遊戲之徒各持錚鼓好以月夜周環其下習肄其樂諺詩謂煤鬼習者此也
일반적으로 지기紙旗는 제액초복除厄招福을 위해 임시로 만들었다가 대보름에 태워 버림으로써 주술종교적 의도를 충족하는 일회용 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매귀악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섣달 보름에 뜰 가운데 세운 뒤, 젊은이들이 그 아래서 악기를 연주할 뿐만 아니라 뒤에 살펴보겠지만 대지기大紙旗의 경우 서낭제를 마친 당일 낮에 벌이는 대동놀음에서 그 아래에 주민들을 거느리는 신간神竿(서낭대)으로서 자리한다.
종이 깃발을 매단 깃대를 서낭대로 보면 섣달 보름 무렵에 벌인 이 행사는 곧 서낭대에 신을 내려 영신하는 과정으로서 지기를 세우고 그 주변에서 젊은이들이 원진을 꾸려 풍물을 치는 것은 영신의 핵심적인 절차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하필 젊은이들로 하여금 영신을 담당하도록 한 것은 아무래도 주술종교적인 인식상 생산의 계절을 상징하는 청년들이 나이 든 이들에 비해서 왕성한 생산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② 대보름이 되면 또 큰 종이기[大紙旗]를 마을 가운데에 세우고 각기 술과 음식을 갖추어 깃발 아래 모여서 먹고 마시는데, 사람들이 오채화五綵花를 꽂고 빼어난 온갖 놀이를 갖추어 펼친다. 至正月十五日又竪大紙旗於村中各具酒食會飮旗下人揷五綵花勝百戲具陳
이 대목은 아마도 대보름 자시子時에 거행되었을 서낭제가 끝난 뒤에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 제사음식을 음복하고 각자가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즐기는 대동놀음의 장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오색 꽃을 꽂고 온갖 놀이[百戲]를 펼쳤다고 한 대목이 주목되는데, 놀이의 ## 내용은 뒤에 펼쳐질 지신밟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지신밟기가 풍물 연주를 바탕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온갖 놀이는 곧 풍물을 매개로 한 것으로서, 소박한 판굿을 포함하는 치배들의 놀음과 주민들의 다양한 재주가 어우러지는 장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달리 주목되는 것은 이 행사에 섣달 보름에 등장한 지기와는 다른 지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기는 그냥 ‘지기’가 아니라 ‘대지기大紙旗’, 즉 큰 지기이고 앞의 지기처럼 ‘정중庭中’에 세운 게 아니라 ‘촌중村中’, 즉 마을의 가운데에 세웠다. 그렇다면 이때 소기와 대기는 어떤 관계에 있는 걸까? 경상북도 안동 하회의 사례가 주목된다. 하회에서는 섣달그믐 무렵에 서낭당으로 가서 작은 서낭대인 내림대에 신을 강신한 다음, 강신이 확인되면 내림대에 달려 있던 당방울을 큰 서낭대에 옮겨 달아 신의 좌정처가 이동했음을 표시한다. 그런 다음에 마을로 내려와서 본격적인 별신굿을 펼친다. 이와 같은 구도 속에서 보면 매귀악에서도 소기에 내린 신을 서낭당에 모시고 서낭제를 지낸 뒤에, 서낭제가 끝나면 대기에 서낭신을 옮겨 모시고 대동놀음과 지신밟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비록 후기의 자료이지만 『학성잡기鶴城雜記』에 실린 매귀유埋鬼遊의 ## 내용이 주목된다.
해마다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큰 장대로 기를 만들어 오색으로 깃대를 꾸민 뒤에 서로 어울려 북을 쳐서 집의 액귀를 쫓아내고 다투어 복을 비니, 이를 매귀유埋鬼遊라고 한다. 대개 나례의 유풍인, 재액을 없애려는 의식이다. 埋鬼遊 每年 正月十五日 閭里之人 以大竿取以建旗 又五色絲結竿 相與擊鼓 逐家爭禱 謂之埋鬼遊 盖儺禮遺風除袚之儀
이 자료에 따르면 지신밟기를 할 때 오색의 실을 묶은 큰 기를 앞세우고 지신을 밟는데, 가정에서 다투어 빌었다고 한다. 이때 가정에서 비는 대상은 당연히 공동체의 신인 서낭신이고, 큰 기는 서낭신의 좌정처이자 서낭신의 현신으로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록 앞선 시기의 것일지라도 문화의 지속성을 감안할 때, 『학성지』에 등장하는 대기 역시 서낭신이 좌정한 서낭기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대보름 낮에 서낭기 아래서 펼쳐진 행사는 단순히 촌민들만 즐기는 음복이거나 대동놀음이 아니라 신인동락神人同樂의 현장으로서, 이미 서낭제를 통해 촌민과 종교적 의사소통을 원만하게 이룬 신에게 다시 바쳐지는 놀이적 증여로서 오신娛神의 과정으로 봐야 할 것이다.
③ 또 기두탈을 쓰고 놀이를 하면서 마을의 길을 누비고 다니다가 집의 뜰을 어지럽게 밟으니 그것을 지신밟기라고 한다. 又以魌頭假面作戲押行里閭亂踏家庭謂之踏地神
이 대목은 지신밟기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지신밟기는 촌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흠향한 신을 모시고 벌인 대동놀음에 이어서 벌어졌다. 대동놀음을 통해서 한껏 고양된 신인神人 관계를 바탕으로 공동체에 내려진 신의 복덕을 각 가정으로 분배하는 한편, 신의 권위를 앞세워 잡귀잡신으로 표상되는 재액災厄을 물리치기 위해 벌이는 행사가 곧 지신밟기였다. 한편 지신밟기에 기두탈魌頭假面이 등장하는 것은 특징적이다. 기두탈은 방상시탈과 마찬가지로 축역의 기능을 담당하는 이목二目의 탈이다. 따라서 기두탈을 썼다고 한 것은 매귀악의 지신밟기에 사용한 탈이 실제로 기두탈이었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귀용면鬼容面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④ 오후 서너 시 무렵에 각기 사목을 지고 와서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에 펴서 모아 둔다. 지기와 함께 사목을 태우면서 상말로 가사呵辭를 지어 ‘등광걸아괘보살’이라는 일곱 자를 천천히 주고받으면서 타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매귀악이라 한다. 또한 ‘등궐살’이라고도 하는데, 방언에 사목을 등궐이라 부르고 태우는 것을 사른다고 한다. 晡時各負査木聚置通衢幷與紙旗焚査作樂以俚言作呵辭曰騰光厥兒掛菩薩以此七字緩緩交唱以待其燼故煤鬼樂亦名騰厥殺方言謂査木爲騰厥謂燒爲殺
지신밟기가 끝나는 늦은 오후에, 사람마다 등걸을 지고 나와 마을의 사거리에 모아 놓는다. 특정인이 등걸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등걸을 가져오는 것은 등걸이 주술종교적 의미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부연하자면 등걸이 집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재액을 모두 담은 주술종교적 상징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등걸을 태워 버리는 것과 연관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각자가 손수 등걸을 가져왔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기 어렵다.
한편 등걸을 모아 태우는 장소가 하필 사거리인 것은 전래의 민간신앙적 사유와 관계있는 것이다. 한국의 민간신앙에서 열린 공간은 재액이 침투하기 용이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사방이 열려 있는 사거리는 재액의 드나듦이 가장 왕성한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거리에 재액의 상징인 등걸을 모아 놓고 태운다는 것은 기존의 재액뿐만 아니라 향후 마을로 들어올 수 있는 재액을 미리 막는다는 방액적防厄的인 의미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재액을 상징하는 등걸과 함께 지기를 넣어 태운다는 점이다. 서낭신의 신체 노릇을 한 지기를 함께 태운다는 것은 결국 이 절차가 송신의 뜻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서낭신의 신체를 태움으로써 송신하는 사례는 와 후대의 매귀악인 병영의 서낭치기 등에서 확인된다. 한편 불을 지른 뒤에 상말로 지은 가사呵辭, 즉 꾸짖는 사설인 ‘등광걸아괘보살’을 서로 주고받았다. 이 말은 “등걸아 귀신을 살라라(태워라)!”라는 말을 이두·향찰식으로 표현한 주사呪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울산 매귀악 특징 및 의의
매귀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크고 작은 지기의 등장과 소각이다. 서낭신을 표상하는 지기가 행사의 말미에 소각되는 사례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둘째, 섣달 보름 달밤에 젊은이들이 풍물을 연주하면서 서낭신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는 노년층에 비해 왕성한 청년층의 생생력에 근거한 것으로서 특징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기두 가면의 존재이다. 방상시와 같은 계통으로서 보다 고형이랄 수 있는 기두가면 또는 그와 유사한 귀용면이 민간의 나례, 그것도 마을 단위의 매귀악(매귀, 매귀희, 매굿, 지신밟기 등)에 등장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등궐살의 문제이다. 민간신앙에서 불이 가지는 벽사소재辟邪燒災의 기능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매귀악의 경우처럼 각기 등걸을 가지고 나와 사거리에 모아 두고 서낭신의 신체인 지기와 함께 태우며 주사를 교창交唱함으로써, 가정과 공동체의 제액 및 방액을 추구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누놀이 정의
땅·나무·돌 등에 놀이판을 새겨 넣고 자신의 말을 움직여 상대의 말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잡아서 승패를 가르는 놀이.
고누놀이 내용
고누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놀이로 지역별로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경기도에서는 고누·고니·꼬니, 전라도에서는 꼰·꼬누, 경상도에서는 꼰, 제주에서는 꼰짜라고 부르는 등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19세기 초의 『물보物譜』라는 책에서 ‘우물고노[格五]’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는데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에서 출토된 10세기 초의 청자 가마터에서 유물이 발견된 것을 보면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던 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14세기의 개인 정원인 담양의 ‘소쇄원’의 마루에도 참고누판이 새겨져 있는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고누는 우물고누·호박고누·밭고누·팔팔고누·곤질고누 등 종류가 다양하다. 또한 그림판과 가지고 노는 말의 숫자도 다양하여 놀이 방법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우물고누·호박고누처럼 상대방의 말을 움직이지 못하게 가두어 이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줄고누·참고누처럼 일정한 조건을 만들어 상대방 말을 다 따내면 이기는 것이다.
여러 고누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많은 흔적이 발견되는 곤질고누의 놀이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곤질고누는 다른 고누와 달리 말을 한 개씩 번갈아 놓아 가며 두는데 놀이 방법이 가장 복잡하고 다양한 묘수가 나오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다. 따라서 고누 중에 가장 으뜸이란 의미에서 참고누, 꽃고누라고도 하였다. 먼저 놀이판을 그리고 각각 12개씩의 말을 가지고 시작한다. 차례는 보통 실력이 좀 더 낮은 사람이 먼저 두는데, 자기 차례가 되면 24개의 교차점 중 한 군데에 말을 한 개씩 놓는다. 가로나 세로, 혹은 대각선으로 세 개의 말이 나란히 놓이면 ‘꼰’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세 개의 말로 ‘꼰’을 만드는 동시에, 상대의 말 세 개가 나란히 놓이지 못하도록 방해하여야 한다. 자신의 말 세 개가 나란히 놓이게 되면 ‘꼰’이 되는데 이때 ‘꼰’이라 외치고 상대방 말 중에서 한 개를 골라서 말판 밖으로 꺼낸다. 말을 떼어낸 자리에 별표를 하거나 다른 표시물을 놓아 두는데 이 자리에는 아무도 자기 말을 놓지 못한다. 그리고 24개의 교차점이 꽉 차도록 계속 번갈아 가며 말을 놓는다.
더 이상 말을 놓을 수 없게 되면 별표 한 자리가 빈자리가 되도록 한다. 즉 빈자리 옆에 있는 다른 말들을 움직여 계속하여 ‘꼰’을 만들고 ‘꼰’을 하나 만들 때마다 상대의 말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 이렇게 계속하여 상대의 말을 제거해 나가다가 상대의 말이 두 개가 되면 이긴다.
자기가 유리하게 판을 짠다고 해서 ‘짤고니’라고 한다. 또 말 하나를 움직여서 두 곳에 꼰을 만들 수 있는 경우에는 ‘양수꼬니’, ‘풀딸꼬니’라고 하기도 하고, 말 하나를 이쪽으로 움직여도 꼰이 되고 저쪽으로 움직여도 꼰이 되는 경우를 ‘들랑꼬니’라고 하는데 들랑꼬니가 만들어지면 상대편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지게 된다.
고누의 종류
고누놀이 특징 및 의의
고누의 놀이 방법이나 형태를 보면 장기나 바둑과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린아이 때부터 시작하여 청소년, 어른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했던 놀이이다. 이해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중에서 한 가지씩 골라서 둘 수 있을 정도로 난이도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놀이판, 말의 개수, 놀이 방법이 매우 다양하다. 또한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가까운 중국과 일본, 몽골, 인도 등에서도 많이 즐겼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사한 놀이가 많다.
삘기 뽑기놀이나 매귀악 같은 전통문화는 사라지면 다시는 복원하기 어렵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기억하고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은 그 따뜻한 경험을 영영 놓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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