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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잇기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말을 가지고 하는 여러 가지 놀이 중에서 말의 머리나 꼬리를 이어 가는 놀이.

내용

말을 장난스럽게 가지고 노는 것을 통틀어 ‘말놀이’라고 하는데 수수께끼나 스무고개, 말머리 잇기, 말꼬리 잇기, 글자풀이, 숫자풀이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대부분 일정한 음률을 가지고 있어 노래하듯 하는데 그 중 말 잇기에 해당하는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말머리 잇기: 말의 앞부분을 이어 가거나 앞부분을 반복해서 외는 것이다.

집집이 총각 나무하러 가세/ 배가 아파 못 가겠네/ 무슨 배 자래 배/ 무슨 자래 업 자래
무슨 업 고래 업/ 무슨 고래 당고개

  • 강원도

뒷집의 김서방 낭구 갑세/ 배 아파 못 가겠네
무슨 배 자라 배/ 무슨 자라 업 자라/ 무슨 업 쌀 업/ 무슨 쌀 진동 쌀/ 무슨 진동 골 진동
무슨 골 맹긴 골/ 무슨 맹긴 당 맹긴/ 무슨 당 사랑 당/ 무슨 사랑 개 사랑/ 무슨 개 둥구 개
무슨 둥구 새 둥구/ 무슨 새 가마 새/ 무슨 가마 쌍 가마/ 무슨 쌍 아이 쌍

  • 황해도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팽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다가/ 꼬부랑 똥이 마려서
꼬부랑 뒷간에 가서/ 꼬부랑 똥을 누어/ 꼬부랑 강아지가 들어와/ 꼬부랑 지팽이로 때렸드니
꼬부랑 깽 꼬부랑 깽

  • 충청남도
  1. 말꼬리 잇기: 말의 뒷부분을 이어 가는 것으로 잇기의 중심이 뒤에 있다.

저건너 김도령 나무하러 가세/ 등 굽어 못 가네 등 굽으면 질매가지/ 질매가지면 네무구지
네무구먼 동시리지/ 동시리면 깜지/ 깜으먼 까마구지/ 까마구먼 높으지/ 높으면 무당이지
무당이면 뛰지/ 뛰면 벼룩이지/ 벼룩이면 붉지/ 붉으면 대추지/ 대추면 달지
달면 엿이지/ 엿이면 붙지/ 붙으면 과거지/ 과거면 좋지

질로질로 가다가 바늘 하나 주웠네/ 주운 바늘 남 주까 남 줄라니 아깝고
대장간에 던졌더니 붕어 한 마리 낚었네/ 낚은 붕어 남주까 남 줄라니 아깝고
도막도막 끊어서 고치장에 발라서/ 먹고 나니 요거요 뀌고 나니 방구다
들이다 보니 친구요 친구 대접을 못했네/ 방구나 한 대 뀌 주까 말만 해도 고맙네

  • 강원도
  1. 말풀이: 그 밖에도 일 년 열두 달을 풀이하거나 사람의 성姓, 숫자 등을 풀이한 말놀이들도 많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달풀이: 정월이라 초 하룻날 혼떡 법떡 먹는 날/ 이월이라 한식날 한식 먹는 날/ 삼월이라 삼짓날 제비 오는 날~ (후략)
• 성풀이: 이 서방 일하러 가세/ 김 서방 김매러 가세/ 조 서방 조하러 가세/ 신 서방 신이나 삼세(후략)
• 숫자풀이:하나 하면 할너미가 지상을 짓는다 딸딸딸/ 두울 하면 두부장수가 종을 친다고 딸딸딸/ 세엣 하면 새각시가 거울을 본다고 딸딸딸(후략)

특징 및 의의

말 잇기가 주가 되는 말놀이들은 거의 노래처럼 전해지고 있다.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게 각 지역의 사투리를 섞어 가며 한다. 말놀이는 각 나라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기반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조상들은 말놀이를 하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후대에 전했고, 아이들은 말놀이를 배우면서 말을 배울 뿐만 아니라 재미와 즐거움을 얻었다. 김소운, 임동권 등의 학자들이 많이 채록했는데 어휘요, 말놀이요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콩주머니놀이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헝겊 주머니에 콩 따위를 넣고 봉하여 공 모양으로 만든 콩주머니를 가지고 노는 놀이.

내용

콩주머니는 주머니 안에 콩을 넣은 것을 가리킨다. 모래를 넣을 때에는 모래주머니라 하고, 팥을 넣을 때에는 팥주머니라 하여 재료에 따라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오자미’라 하는데, 이는 일본어 오테다마(お手玉)의 서일본 방언인 ‘오자미(おじゃみ)’에서 왔다.

콩주머니놀이는 주로 여자아이들이 즐기는 놀이인데, 놀이 방법이 여러 가지이다. 혼자나 두서너 명이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콩주머니놀이는 저글링(juggling)과 같은 농주弄珠 방식의 놀이이고, 야외에서 편을 짜서 하는 콩주머니놀이는 피구避球와 같은 공놀이 방식의 놀이가 대표적이다.

저글링 방식의 콩주머니놀이는 콩주머니의 수효에 따라 방법을 달리한다. 한 손으로 두 개를 가지고 노는 방식은 두 개의 콩주머니를 손에 넣고 하나를 위로 올린 다음 떨어지기 전에, 손에 있는 것을 위로 올리고 내려오는 것을 받는다. 두 손으로 세 개를 가지고 노는 방식은 왼손과 오른손에 한 개씩을 쥐고 위로 한 개를 올린 다음, 한 번은 오른손에 있는 것을 위로 올리면서 떨어지는 것을 받고, 그 다음에 왼손에 있는 것을 위로 올리면서 떨어지는 것을 받는 식으로 되풀이한다. 이 외에 여러 개를 가지고 노는 방식이 있다. 이와 같은 콩주머니놀이는 농주弄珠, 농환弄丸과 같은 놀이를 흉내 낸 것으로 보인다.

피구 방식의 콩주머니놀이는 여럿이서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는 방식이다. 먼저 가위바위보를 해서 편을 짜는데, 이긴 편이 ‘수콩’이 되고, 진 편은 ‘앙콩’이 된다. 땅에 그린 직사각형 놀이판 안에 앙콩이 들어가서 수비를 하고, 수콩은 놀이판 밖에 서서 공격을 한다. 수콩이 자기편끼리 콩주머니를 던지고 받다가 기회를 봐서 놀이판 안에 있는 앙꽁을 맞추는 방식이다. 콩주머니에 맞은 사람은 ‘죽은 것’이 되어 놀이판 밖으로 나와야 하며, 수콩이 던진 콩주머니를 앙콩이 잡을 경우 자기편 한 명을 살리거나 콩주머니를 던진 수콩을 퇴장시킬 수 있다. 만약 수콩이 던진 콩주머니를 받지 못하고 땅에 떨어뜨린 수콩은 ‘죽은 것’이 되어 퇴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앙콩이 모두 죽을 때까지 놀이를 진행한다. 제주도에서는 ‘콩주멩기’라 하며, ‘콩주멩기’는 콩주머니를 이르는 제주 방언이다.

이외에 긴 장대 위에 바구니를 매달고 일정한 시간 내에 콩주머니를 던져 어느 편이 많이 넣는가를 겨루는 방법과 박을 매달아 콩주머니를 던져 맞추어 누가 먼저 터뜨리는가를 겨루는 방법이 있다. 콩주머니를 많이 채우거나 박을 먼저 터뜨리는 편이 이긴다.

특징 및 의의

콩주머니는 헝겊 조각을 이용하여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콩이나 팥, 모래 등을 넣어 만든 간편한 놀이 도구이다. 놀이 도구가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여 쉽게 만들어 놀았던 놀이이며, 특히 공이 귀한 시절에 공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유용한 놀이 도구였다. 콩주머니놀이는 예전처럼 활성화되지 않고 있지만, 교육적 차원에서 여전히 활용되고 있으며, 특히 유아용 놀이로 많이 응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비사치기’를 흉내 낸 콩주머니놀이를 들 수 있는데, 일정한 거리에 물건을 세워 놓고 콩주머니를 던져서 넘어뜨리는 방식과 콩주머니를 머리에 이고 가서 떨어뜨려 세워진 물건을 넘어뜨리는 방식 등이 있다. 유아의 신체 감각을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의령 큰 줄댕기기 정의, 역사,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경상남도 의령 지역에서 전승되어온 줄다리기.

역사

큰 줄댕기기는 의령읍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온 ‘고을형’ 줄다리기로서 대보름에 연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전승이 어려워져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두세 차례 연행된 뒤에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도부터 다시 전승되기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줄을 당길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전쟁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한 1957년부터 다시 줄을 당기기 시작해서 1974년까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해마다 줄을 당겼으며, 줄의 규모는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유동적이어서 일정하지 않았다.

한편 의령에서는 1973년부터 임진왜란 당시 의병 장군으로 활약한 곽재우郭再雨(1552∼1617) 장군과 휘하의 의병들을 기리기 위해 의령 홍의장군축제(의병제전)이라는 축제를 개최했다. 큰 줄댕기기는 1975년에 의령 홍의장군축제(의병제전)의 행사로 포함되었으며, 이후 축제 기간 중인 4월 22일에 줄을 당기게 되었다. 축제에 참가한 해부터 3년간은 매년 줄을 당기다가 그 뒤 격년제로 바뀌었으며, 1980년대 초반 이후부터 3년에 한 번씩 줄을 당기게 되었다. 이렇게 연행의 주기가 변한 것은 인력 동원의 어려움과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다.

1997년에 이르러 큰 줄댕기기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고, 같은 해에 ‘의령큰 줄댕기기보존회’가 결성되었다. 문화재 당시 ‘큰 줄댕기기’라는 이름을 문화재 명칭으로 삼은 것은 지역민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큰 줄댕기기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지 8년 뒤인 2005년 4월 22일에는 의령천 둔치에서 기네스북 인증을 위한 계측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줄 길이 251m, 줄 무게 54.5t으로 측정되어 세계 최대의 줄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내용

큰 줄댕기기의 연행 공간은 원래 육일정六一亭 밑에 있는 ‘남산또랑(남산천)’이었다. 그 뒤 남산천에 둑이 생기면서 현재의 충익사 터인 ‘버들밭’으로 이동하였으며, 1978년 충익사가 건립됨에 따라 공설 운동장으로 옮겨졌다. 또한 2005년에는 공설 운동장에 인조 잔디를 심음에 따라 연행 공간이 의령천 둔치로 바뀌었다.

전통사회에서 의령의 줄다리기는 ‘큰 줄’과 ‘동네줄(골목줄)’로 전승되었다.큰 줄은 옛 의령현의 읍치인 의령읍에서, 의령 고을에 속하는 각 면의 사람들은 물론 인근의 합천, 함양, 진주 등지의 사람들이 참가해서 벌였던 대규모의 줄다리기였다. 한편 동네줄은 마을에서 연행하는 소규모 줄다리기로서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례면 갑을리, 칠곡면 외조리, 유곡면 세간리 등지에서 전승되었다.

큰 줄댕기기의 편은 의령읍을 두 지역으로 나눈 뒤 출생지를 고려하여 구성하였다. 그 기준이 되는 곳은 옛 관아터인 군청 정문에서 남산으로 통하는 ‘한종로(큰길)’이다. 이곳을 사이에 두고 서북쪽의 산간 지역에 위치한 곳은 ‘물위’, 남동쪽의 강변 지역에 위치한 곳은 ‘물아래’로 구분했다.

과거에 물위에 속한 곳은 중동 일부와 서동·서신·가례면·칠곡면·화정면·대의면·합천 삼가면·진주 미천면 등이었고, 물아래에 속한 곳은 중동 일부·동동·용덕면·정곡면·지정면·유곡면·궁류면·신반·함안군의 월촌과 정암 등이었다. 중동은 편 가름의 중심이기 때문에 반은 물위에 속하고 나머지 반은 물아래에 속했다. 현재의 편 구성은 행정구역의 변화를 반영해서 물위는 의령읍 일부·가례면·칠곡면·대의면·화정면·궁류면·유곡면·진주·합천 등이고, 물아래는 의령읍 일부·용덕면·정곡면·지정면·낙서면·부림면·봉수면·함안·창녕 등이라고 한다.

줄의 재료로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짚과 함께 칡을 썼다. 당시에는 보통 ‘삼가배줄(삼합줄)’ 한 가닥에 칡 서너 개 정도를 넣어서 줄을 꼬았는데, 그 뒤로 벼의 생산이 활발해지고 짚의 확보가 용이해지면서 전적으로 짚을 사용해 왔다.

줄의 형태는 쌍줄이다. 암줄은 일반적인 쌍줄의 형태와 같지만 수줄은 달랐다. 수줄은, 원줄을 둘로 접어서 줄머리와 줄목을 만들고 그 뒷부분을 합쳐 몸줄을 만든 암줄과 달리, 원줄의 반을 접지 않고 끝부분만을 접어 줄머리와 줄목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수줄의 굵기는 암줄에 비해 가늘었고, 그 형태도 암줄은 펑퍼짐한 데 비해 수줄은 둥글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다시 줄을 당기면서부터 제작상의 어려움 때문에 암줄과 수줄을 모두 과거의 암줄 형태로 만들고 있다.

큰 줄을 당기기에 앞서 앞놀이를 벌였는데, 앞놀이는 가장행렬을 포함한 길놀이였다. 1940년대 후반까지 벌어진 길놀이는 각 편 ‘모가비’의 집 앞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줄을 당기는 남산천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모가비란 양편을 각각 이끄는 우두머리를 말하는데, 집안이 좋고 신망이 두터우며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가장행렬에서 물위의 모가비는 혼례의 신랑옷을 입고 소를 탔으며 , 물밑의 모가비는 신부옷을 입고 가마를 탔다. 길놀이를 할 때 가면을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가면은 주로 바가지와 종이를 이용해서 만들었으며, 다양한 인물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한편 놀이의 전개 과정과 승부의 결정 방식은 일반적인 쌍줄다리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암줄과 수줄을 결합할 때 쓰는 ‘비녀목’을 운반하는 방식과 두 줄을 결합하는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우선 다른 지역에서는 보통 비녀목을 특별한 절차 없이 운반하는데 비해 현재 의령에서는 비녀목에 줄을 걸어 목도를 하고 그 위에 수줄 편의 모가비가 탄 뒤 줄을 결합하는 현장으로 옮기고 있다. 다음으로 보통 암줄과 수줄을 결합할 때, 암줄이 줄머리를 세우고 기다리면 수줄이 다가와서 암줄의 줄머리 안으로 들어가는 데 비해 의령에서는 수줄이 꼿꼿이 줄을 세우고 있으면, 암줄이 다가와서 줄머리를 벌려 수줄에 끼운다. 수줄 중심의 결합방식으로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두 줄을 결합한 뒤에 줄을 당겨서 승부가 결정되고 나면 즉시 줄을 해체하였다. 주민들은 줄을 끊어다가 불을 때거나 삶아서 먹으면 사내아이를 갖는다거나, 문지방 위나 대문에 걸어두면 재액을 물리치고 복을 얻을 수 있다는 등의 속신에 따라 줄을 끊어서 집으로 가져갔다. 한편 사람들이 가져가고 남은 줄을 소의 여물로 쓰기도 했는데, 줄을 만들고 당기는 과정에서 짚이 많이 부드러워졌기 때문에 소가 잘 먹었다고 한다.

한편 큰 줄댕기기의 뒤놀이로 상여놀이를 벌였다. 양편은 줄을 당기기 전에 미리 상여를 준비해 놓는데 이때 상여는 실제 상례 때 쓰는 것보다 간소하게 만든 ‘백상여白喪輿’이다. 상여의 바깥에는 창호지를 붙이고 꽃장식을 해서 꾸몄다. 과거에는 줄을 당기고 난 뒤 이긴 편이 상여 위에 모가비를 태우고 읍내에서 길놀이를 한 뒤, 모가비의 집에 들러 풍물을 치며 한바탕 놀이판을 벌였다. 그런 다음에 “상대편이 졌으니까 초상 치르러 간다.”라고 하면서 상여를 메고 농기를 앞세운 채 상대편 지역으로 들어갔다. 앞소리꾼인 ‘종구쟁이’가 상대방을 헐뜯는 사설을 메기면 상두꾼들이 뒷소리를 받았다. 상여를 메고 돌아다니다가 상대편과 마주치면 승부의 결과를 두고 실랑이가 벌어졌으며, 말싸움이 곧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상여가 부서지거나 농기가 훼손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줄다리기에서 물아래 편이 이기면 비가 많이 내리지 않고, 물위가 이기면 비가 자주 온다고 했다. 물아래 편은 남강변에 살고 있으므로 비가 많이 오면 강물이 범람하여 폐농하기 일쑤였다. 이에 비해서 물위 편은 산간 지역에 살고 있으므로 물이 귀해 비 오기를 기다리는 처지였다. 이런 까닭에 비가 많이 내리지 않으면 물 아래편에 풍년이 들고, 비가 제대로 오면 물위 편에 풍년이 들어 시절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징 및 의의

의령 큰 줄댕기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반적인 쌍줄다리기는 거주지에 따라서 편을 구성하지만 의령에서는 현재의 거주지보다는 ‘안태본’을 우선시해서 출생지를 편 가름의 기준으로 삼는다. 둘째, 의령에서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줄의 재료인 짚 외에 칡을 줄의 재료로 사용했다. 칡을 넣는 형태가 짚으로 만드는 것보다 오래된 것이란 점을 감안할 때, 의령 큰 줄의 전통성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현재 의령 큰 줄은 130여 가닥의 삼가배줄을 합쳐서 만들고 그 길이도 한쪽이 120여 미터에 이른다. 규모로만 보면 현전하는 줄다리기 가운데 최대이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기네스북에 올랐다. 넷째, 큰 줄댕기기의 앞놀이는 가장행렬을 포함한다. 줄다리기에 앞서서 앞놀이를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의령의 경우처럼 소를 탄 신랑과 가마를 탄 신부가 등장하는 한편, 각종 깃발과 가면 쓴 이들이 함께 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섯째, 뒤놀이로 상여놀이가 연행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전라남도 순천 해룡면의 코줄다리기에서도 나타나지만 양편의 격돌이 치열하게 이루어져 상대편의 상여를 부수고 농기를 훼손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보다 역동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여섯째, 일반적인 줄다리기가 ‘고정형’을 취하는 데 비해서 의령에서는 가변형’을 취하고 있다. 어느 쪽이 이기든 그 주술종교적 결과를 양편이 공유하는 ‘고정형’과 달리 ‘가변형’에서는 이긴 편이 좋은 결과를 독점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놀이의 양편은 한층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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